식사 중에 시작된 인연(인연)

첫 길을 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신호를 주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기다리자 뒤에서 119구급차가 번쩍거리며 휙 지나갔다.

누군가는 지금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지금은 서울이 아니기 때문에 저 119구급차가 응급실을 한 번에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119 구급대 구급차새로 개업했다는 거리의 플래 카드를 보고차를 세우고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주차장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돌아다니며 골목을 지나 결국 새로 개업했다는 해장국 집 앞에 차를 주차할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서 바로 옆에 주차장이 다른 가게 주차장이어서 잠시 돌고 돌아온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쇠고기 국밥(특)을 주문했다.

보통을 주문하면 푸대접에 된다는 것을 뼈 있는 가게 집 아저씨가 가르친 나비 효과라 할까..바로 반찬이 나오지만 계란 프라이가 스테인리스 접시에 나왔다.

계란 프라이는 반찬으로 내어 주는 가게는 없잖아?왜 나한테 계란 프라이를 내밀지?결국 궁금해서 물어봤다.

”사장!
프라이는 원래 나옵니까?아니면 혹시 특별 주문하고 나한테만 내어 주나요?” 다릅니다!
관계 없이 원래 나오는 것입니다!
” 그렇군요~저는 반찬에 계란 후라이를 내어 주는 가게는 처음이라..”흐흐흐” 그랬다.

옛날에 친구 가족과 식사를 하면, 친구의 아내는 꼭 계란 프라이를 따로 주문했다.

계란 프라이는 메뉴에도 없는데 아이를 위한 반찬에 그저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돈을 더 내라고 해야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주는 집이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하지 있다는 어느 가게는 계란 후라이 하나에 500원을 받아 어떤 가게는 주문하지 말라는 뜻인지 1000원을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해장국 집에 와서 계란 프라이를 주문하지는 않았지만 받은 것이 너무 당황하고 어색했다.

계란후라이(어렸을때는 계란후라이라고 불렀는데..)사장이 어느새 또 주방에서 나왔다.

”혹시 여기 분 아니죠?”네,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 사세요?아니, 고향은 어디입니까?”저는 어릴 때부터 서울에 살고 있고 서울 사람입니다”” 그렇군요~저는 OO구에 살고 와서 저도 이곳이 아니에요””아~저도 거기에 살던?”” 지나가는 거지 및 만찬이라 여기 사람이 없다면, 더 이상 질문을 안 할 수도 있었지만, 대화가 길어졌다.

그렇게 식사 도중 서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고교까지 근처에서 살고 나보다 일년의 차이가 있지만, 등하교 할 때 한번은 지났는지도 모른다 인연(인緣)이므로, 서로 기뻤다.

그렇게 반가움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어느덧 사장의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가정사까지 나왔지만 말기 암 4기에서 최후를 아들이 장사고 있는 이곳까지 내려와서 보내려고 가게에 하루 종일 있다고 말씀하셨다.

소고기국밥지나온 구절절 간병 스토리와 서울에 크게 두었던 고깃집을 두 번이나 뒤집어 놓고 이곳에 내려와서는 장사가 안 되고, 한 달 동안 쉬면서 완전히 리노베이션을 해서 새로운 메뉴로 오픈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다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효자 앞에 있는 불효자 같은 느낌이었다.

계산을 끝내고 나서 힘내라고 말을 걸었더니 ‘선배~’라고 하길래.. “나는 나이를 불문한 사람이니까 우리 친구해요~!
” 그리고 발길이 멀어지면서 “한 번 안아봐도 될까요?”라고 의사를 물어 찡하게 포옹을 했다.

소곱창전골그렇게 그 인연은 거기까지인 줄 알았는데 한참 지난 어느 날 그쪽으로 지나갈 수 있었고, 그래서 그 가게에 다시 들어갔다.

”사장님~!
또 왔어요!
아니, 미국에 안 갔어요?네, 사장님을 뵙고 갈 겁니다.

금방 갈게요소곱창전골을 하나 담았다.

친구가 되기로 했지만 성격상 여전히 망설임이 어려웠다.

어쨌든 그렇게 또 반가운 두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눴는데 사장님 어머님이 안 계셨다.

어머니는 몸이 갑자기 나빠져 서울의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고 한다.

이제 더는 병원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목이 메었다.

이번에는 소곱창전골을 시켜 먹었다.

반찬도 맛있기 때문에 물어보니 반찬도 모두 직접 담근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계산을 하고 이번에는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저는 아직 49세가 지나지 않았는데 제가 더 약한 모습이거나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고 다시 포옹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한국에 와서 친구나 지인들도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는데 새로운 인연을 더한 느낌이었다.

서울에 가는 길이 막혀서 서행을 하다 장의사의 차가 보였다.

고급 리무진으로 모시는 것이 최근 한국에서는 유행이 매우 중요 사항이라고 하지만 그 같은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았고 미국도 한국처럼 긴 최신형 Stretch limousines장례식 차량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고인이 마지막 길을 동행하는 차량이 20대 이상 한줄로 나란히 대통령이 달리는 차량 행렬처럼 작은 깃발과 표시를 하고 달리기를 볼 수 있지만 도로의 모든 차량이 길을 피한다.

그리고 장례식 차량을 절대 추월하지 않는 것도 미국의 나라의 룰이다.

막다른 골목을 하고 원래 1시간 거리인 서울까지 3시간 이상 막다른 골목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장례 차 뒤에서 달리는 열차로 생각이 더 많아지면서 사람의 마음을 정말 침착하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혹시 미련이 남게 되는 길이 이렇게 막히는지..서울로 가는 길이 막혀 서행을 하고 있는데 장의사 차가 보였다.

고급 리무진으로 모시는 것이 요즘 한국에서는 유행이고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한국처럼 긴 최신형의 Stretch limousines 장례식 차량을 많이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동행하는 차량이 20대 이상 일렬로 늘어서 대통령이 달리는 차량 행렬처럼 작은 깃발이나 표시를 하고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도로의 모든 차량이 길을 피해준다.

그리고 장례 차량을 절대 추월하지 않는 것도 미국 국가의 규칙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원래 1시간 거리인 서울까지 3시간 넘게 막혔다.

여전히 장례식 차량 뒤쪽에서 달리다 보니 생각이 더 많아지고, 사람의 마음을 정말 차분하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혹시 미련이 남아서 갈길이 이렇게 막히는건지..